※ 江陵劉氏 大同譜 ※
| 始組 | 유 전 (劉 筌) | 中國 한나라 太祖 상황의 40대 손으로 高麗 문종36년 朝鮮에 귀화함. 高麗 文宗대부터 毅宗 肅宗 睿宗朝에 이르기 까지 여러 벼슬을 자냈음. 字 : 元甫 號 : 竹杆 諡號 : 文樣公, 예종17년(1123년 6월 7일)졸, 경북 영천군 영천읍 녹전동에 묘소가 있음. |
| 2세 | 子1 견 규(堅 規) 子2 견 구(堅 矩) 子3 견 익(堅 益) |
호: 백인당, 봉익대부도검의찬성사정승 거타군에 봉함 광정대부 밀직사사대사헌. 이조판서 대사헌 |
| 3세 | 1의 子 춘 무 (春 茂) 2의 子 웅 열 (웅 열) 3의 子 함 ( 諴 ) | 좌려태조신검관 승록대부겸판진리치사, 아림군에 봉함 공부상서 평장사좌복사. |
| 4세 | 성(成),광협(光協), 담(聃),총(聰) |
우리 江陵 劉씨의 始祖인 劉 筌의 墓所는 경북 영천군 영천읍 녹전리에 위치하고 있는 바
이곳에 세워진 墓碑의 墓碑銘 내용을 보면 始祖 할아버지의 行績을 잘 알 수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이곳에 세워진 墓碑의 墓碑銘 내용을 보면 始祖 할아버지의 行績을 잘 알 수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 행 적 의 기 록 (行 跡 의 記 錄) ※
선생의 諱는 筌이요, 字는 원보요, 號는 죽간이요, 姓은 劉씨요 벼슬은 正憲大夫 兵部尙書요, 彭城人이시니 漢 太祖의 40대 孫이라. 曾祖의 諱는 宗이니 벼슬이 翰林이요 組의 諱는 迪이니 벼슬이 吏部尙書요 父의 諱는 采 이니 벼슬이 金紫光綠大夫라. 先生이 宋나라 仁宗 辛卯 4월 8일에 出生하셨는데 稟性이 剛穀 正直하시고 學殖과 度量이 깊고 넓으시어 서적이라곤 通達하지 않함이 없이 九經百家 및 天文地誌 馥筮醫學을 모두 硏究識得 하였기로 世人들이 經國濟世할만한 人才라고 擧稱하였다. 集賢殿에서 大樂을 제정할 때 임금이 中貴人(宦臣)으로하여금 참관하게하니 선생께서 이를 諫爭하여 참관을 못하도록 하였고 공어사(덕수)는 諫하다가 벼슬에서 떨어졌다. 선생이 極諫하여 가로되 中書(궁중에서 초서를 맡은관서)의 宦官이 直言을 排斥하는 理由는 陛下의 聖明하심을 흐리게하고 천하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것 이다 하였다. 天禧年間에 政堂論爭이 편당적으로 일어나자 선생께서 퇴근길에 한 친료에게 서한을 보내 가로되 “소인들의 狡猾함은 죄과가 없는 듯이 감추고 군자의 偏僻함은 瑕疵가 있는것만 같으니 罪過가없는 小人들은 寬容하고 瑕疵가있는 君子를 내침이 어찌 識見이 있는자가 할 일인가?”라고 하셨다. 그때 奸臣들이 黨을지으니 고운 비단에 파리똥같이 聖政에 汚點이생기고 또 靑苗法(벼가 익기전에 조세를 부과하는 법)이라는 新法으로서 生老病死의 苦가 생긴다는 말이 있었다. 선생께서 이를 직도로 反對 했으나 容納지 아니함으로서 이에 同志 七學士 임팔급 설인검 허중 송규 최와 권지기 공덕수와 배를타고 바다를 건너 東國으로 나와 처음 杞溪(경주속읍)에 居住하시다가 그뒤에 東居郡(永川)으로 移居 하였으니 즉 高麗 文宗때라. 浮海小序에 詩가 있으니 그 시에가로되 “이내몸 한번 고려에 온뒤로 어찌하여 故國愁心 잊어버리랴. 그리운 우리임금 언제봤던고 보고파 쏟는 눈물 금할수 없어라.” 하였고 穗送坮記와 詩가 있으니 그 시에 가로되 “쓸쓸한 가을날 수송대에 올라 내 시름 멀리 고국으로 보내노라. 그러나 어느곳이 중국땅인지 사람들은 아쉬움을 몰라 주노라.”하였고 또 自警詩가 있으니 “ 道德을 지키면 가난도 좋고 글월을 대하니 世俗과는 멀어지네 이마음 굳이 잡아놓지 않으면 그제야 本性이 돌아오리라.” 하였다. 이 세수의 시만 보더라도 선생의 學文이 어떻하다는것과 임금을 사랑하는 忠心을 가히 알 수 가 있다. 선생이 慨然히 異端을 排斥하고 儒道를 밝힘으로써 自身의 責任으로 여기고 글집을 건설하여 禮樂을 振興시키는데 급급하시니 朝野가 모두 흡족이 여기고 冊을 가지고 와 學業을 익히는 者 千數이라. 晩年에야 임금님의 徵召에 應하여 聖治를 補導함으로써 美風을 남은 대중속에서 다시보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하늘이 哲人을 中國에 태여내고 그로하여금 聖道를 高麗에 펴어 三韓의 舊習을 씻어내고 오래도록 끊겼던 실마리를 다시 이어가도록 한 것이니 어찌 거룩하지 아니한가? 先生께서 壬寅이월초칠일에 卒하셨으니 享年72세라. 配에 徿西 李씨는 貞敬夫人을 受封했고 己未모월에 出生하여 癸酉유월칠일에 卒하셨으니 墓는영양군(영천고호)명산면 화지동 亥座에 상하봉으로 되었다. 아들 셋을 두었으니 長男 賢規는 벼슬이 平章事로 居陀君을 受封했고 次男 堅矩는 匡靖大夫大司憲이요, 三男 堅益은 벼슬이 奉翊大夫大司憲이다. 현규의 子 春茂는 벼슬이 文林郞으로 三司를 追封했다. 춘무의 子 成은 벼슬이 樞密副使崇綠大夫요, 견구의 子 雄悅은 崇綠大夫로 娥林君을 受封했고, 견익의 子 咸은 벼슬이 安岳郡事左僕射라. 曾孫 玄 孫이하는 많아서 記錄하지 않았노라. 아! 先生께서 東으로 朝鮮에 건너오셔서 그 높으신 功勳과 충열과 德望과 行儉이 國家의 담틀이요, 士林의 領袖이라. 충열왕때 諡號를 文樣이라 하고 특히 國家의 優典이 있었으며 平章事 조자기가 그의 神道碑文을 지어 성덕을 誇示하였고 그뒤에 열성조의 賢臣 翰林學士 계장수, 대제학 박의충, 대사성이문청, 서장관 홍사범, 대제학 박상의 등이 各各 疎帳을 올려 가로되 “文樣公 劉筌은 東方理學의 祖宗으로서 그 勳德이 옛적 周公, 召公, 太公에 比喩한다 해도 오히려 竝列할만 한데 崇奉하는데 있어서는 아직까지 祠宇가 없으니 어찌 臣들의 부끄러운바가 아니리요”라고 하였다. 임금의 特命으로 禮官이 慰靈祭를 行하고 開城府에 祠堂을 建立하여 영원히 英靈을 편히 모시고 또 崇義殿에 配享하여 國家와 더불어 함께 빛나게하고 田土와 奴僕을 下賜하여 尊奉함으로써 그 功德에 報答 하였다. 슬프도다. 桑田이 碧海로 一變할제 여러번 變亂을 껵고 後孫들이 孱弱하여 짐으로 墳墓를 失傳한지 삼사백년이려니 어찌나 다행하게도 하늘이 도웁고 선령이 복을 내려주심인지 後孫 응상이 墓는 찾았으나 誌石은 찾지못했던 것을 壬寅년 봄에 인원이 誌石을 發見하는 동시에 근처의 愉葬塚을 굴거했고 그 다음해에 先生木版本猶集을 杞溪兪氏의 집에서 發見했으니 어찌 奇異한일이 아닐까? 이는 易經에 이른바 “밤이 가면 낮이 온다”는 그 理致라. 그리고 대범 詩라는 것은 世敎에 關聯이 있으며 또한 世陋를 諷刺하는 하나의 方道이니 先生의 猶集이 아무리 流落되었다고 할지라도 世上에 傳하게되니 治國에 도움이 되리라. 끝.
위에 소개한 行蹟記錄 이외에 墓碑銘,誌石노래,遺稿集,神道碑銘등 始祖 劉筌을 紹介하는 資料는 많으나 省略한다. 紹介한바와 같이 始祖이후 많은 子孫들이 繁昌하여 각기 각 고을에 居住하면서 벼슬을 지낸 先祖를 모시는 門中마다 각기 本官을 따로하는 등 氏族이 派生케 되는데 특히9世 權의 子 潭이 居昌을 2世 견구의 直系孫 10世 賢은 娥林을 담의 셋째叔의 子 松栢은 江陵을 本官으로 하는 등 宗派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후 송백의 손(12세)敞이 李氏朝鮮 開國時 李太祖를 도와 開國에 同參하여 파평부원군 윤호, 평원군 조영규,남양군 홍길민등과 더불어 開國功臣 2等級을 받아 玉川(江陵의 舊號)府院君에 封하였다. 高麗朝에는 각 종파별로 흩어졌던 문중들을 조선조에 이르러 체계적으로 統括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 劉氏도 12世 敞을 中始祖로 삼어 모든 劉씨를 統括하여 本官을 江陵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15世 名虛의 長子 信甲을 中始祖로하여 居昌을 본관으로 하였고 15世 永道의 長子 强을 中始祖로하여 本官을 白川으로 定하니 卯金刂 劉氏는 이로써 거창, 백천, 강능을 본관으로하는 3개의 종파로 나뉘게되었다. 지금까지 우리 江陵劉氏에대한 대략적인 族譜내용을 간추려 보았다. 살펴본바에 의하면 12세 玉川府院君으로부터 강능유씨의 체계적인 族譜의 構成이 이루어진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에 中間始祖인 옥천부원군에 대한 記錄을 살펴보니 여러 가지 文獻에 公의 記錄이 維持되어 있다. 李朝實錄, 哺隱 鄭夢周의 文人集, 牧隱 李嗇의 文人集, 野隱 吉宰의 文人集등 수없이 많은 기록이 있으나 여기서는 公의 墓碣銘을 紹介하기로 한다.
위에 소개한 行蹟記錄 이외에 墓碑銘,誌石노래,遺稿集,神道碑銘등 始祖 劉筌을 紹介하는 資料는 많으나 省略한다. 紹介한바와 같이 始祖이후 많은 子孫들이 繁昌하여 각기 각 고을에 居住하면서 벼슬을 지낸 先祖를 모시는 門中마다 각기 本官을 따로하는 등 氏族이 派生케 되는데 특히9世 權의 子 潭이 居昌을 2世 견구의 直系孫 10世 賢은 娥林을 담의 셋째叔의 子 松栢은 江陵을 本官으로 하는 등 宗派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후 송백의 손(12세)敞이 李氏朝鮮 開國時 李太祖를 도와 開國에 同參하여 파평부원군 윤호, 평원군 조영규,남양군 홍길민등과 더불어 開國功臣 2等級을 받아 玉川(江陵의 舊號)府院君에 封하였다. 高麗朝에는 각 종파별로 흩어졌던 문중들을 조선조에 이르러 체계적으로 統括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 劉氏도 12世 敞을 中始祖로 삼어 모든 劉씨를 統括하여 本官을 江陵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15世 名虛의 長子 信甲을 中始祖로하여 居昌을 본관으로 하였고 15世 永道의 長子 强을 中始祖로하여 本官을 白川으로 定하니 卯金刂 劉氏는 이로써 거창, 백천, 강능을 본관으로하는 3개의 종파로 나뉘게되었다. 지금까지 우리 江陵劉氏에대한 대략적인 族譜내용을 간추려 보았다. 살펴본바에 의하면 12세 玉川府院君으로부터 강능유씨의 체계적인 族譜의 構成이 이루어진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에 中間始祖인 옥천부원군에 대한 記錄을 살펴보니 여러 가지 文獻에 公의 記錄이 維持되어 있다. 李朝實錄, 哺隱 鄭夢周의 文人集, 牧隱 李嗇의 文人集, 野隱 吉宰의 文人集등 수없이 많은 기록이 있으나 여기서는 公의 墓碣銘을 紹介하기로 한다.
※ 玉川府院君 領議政 諱 敞의 墓碣銘 ※
公의 諱는 敞이요 字는 太和요 初諱는 敬이요 字는 孟儀라. 劉氏가 中國의 華曺로서 兵部上書 諱 筌이 東國에 嫡配하여 居住하였다. 8代孫인 諱 承備에 이르러 左僕士로 벼슬을 마치고 江陵의 羽溪로 移居로 인하여 羽溪로 (지금의 강능) 本官을 삼았으니 이는 公의 曾祖라, 組의 諱는 松柏이니 開成尹이요, 考의 諱는 天鳳이니 安岳郡事 贈 右議政이요, 妃에 貞敬夫人 喬洞田氏는 備巡衛 成茂의 女라. 公이 至正 壬辰年에 出生 하였는데 天稟이 凡人보다 뛰어났다. 겨우 入學한때에 사람들이 놀랄만한 말을하고 애들과 놀되 智略을 자아내어 애들을 屈伏시켰다. 成長해서는 人品이 端嚴하고 德性이 묵직하며 隨후의 夜光珠와 崑崙山의 美玉이 사람에게 비친 것 같았다.나이 17세때 科擧에 生員하고 20세때 及第하였다. 文章은 餘事로 삼고 오직 學文에 뜻을두어 처음 些隱 田先生을 스승삼고 다시 牧隱 哺隱 양선생 門下에 從遊하여 格物 致誌 성의정심의 공부를닦아 息肩이 뛰어나서 사람들의 尊敬을 받았다. 목은 양촌 두분이 윤폐와 더불어 이초의 변에 모함으로 청주옥에서 형문을 당하였다. 사람마다 위태롭게 생각했으나 公만은 泰然한 姿勢로 반듯이 天變이 있을 것 이라고 말씀 하셨다. 하루는 큰 비가내려 洪水가 났다. 그리하여 고문관들이 표류하다가 나무를잡고 살아났다. 두분은 석방되고 罪의 有無는 不問에 붙였다. 사람들은 公의 미리보는 점에 대하여 歎服하였다. 그때에 朝政이 昏亂하여지자 드디어 隱退하였더니 太祖가 登極하자 探聞하고 불러다가 처음 成均館大司成을 두어 人才養成의 責任을맡기고 太祖가 날마다 經筵에 臨御하여 公과 柳寬을 명령 日直을 교대시키고 因하여 開國勳에 祿命하였다. 이는 公이 자취를 감춘날인데도 太祖가 特命한 것은 대개 그 人望을 取하였던 것이다. 寵愛는 날로 높아지나 벼슬은 公의 本志가 아님으로 解任하고 神仙배우기를 懇請하였으나 임금을 버리는 것은 忠이 아니라는 太祖의 敎命에 그 뜻을 行치 못하고 仙庵이라고 自號를 하였다. 이제부터는 조정에 있으면서도 신선될 마음은 잊지 않았다. 太宗朝때 글자를 써주어 (御筆) 빛내주고 3代를 追贈하고 子孫들을 百世까지 宥罪케하고 雲臺에 肖像을 걸고 盟錄에 이름을두고 田土를 下賜하고 金石에 功을 새기는 등등 이 모두 世上에 드문 恩惠인 것이다. 散騎常侍知製敎 世子輔德承旨를 歷任 嘉善大夫에 昇進 都評議使寶文閣學士 世子副賓客玉城君이요, 資憲大夫에 승진 知經筵寶文藝文堤學이요, 崇政大夫에 昇進 世子 貳師요, 輔國崇綠大夫에 승진 封 玉川府院君 겸 大提學이다. 公의 나이 老哀하지 않아서 마침내 休退하여 山水에부치고 歌詞를 지어 스스로 興을 도꾸되 그 歌詞에 山 절로 조용하고 물은 절로 흐름이여 이는 바로 이 天地에 自然에서 된것이요, 꽃은 절로 피어 있고 새는 절로 지저귀니 이는 바로 오 萬物의 自然에서 옴이라. 仙字로 自號 짖고 집도 한 채 마련하니 이는 바로 나에게는 그지없는 興趣로다. 하였으니 이에 根本志操가 여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가히 지내신지 십여년인 永樂 庚子年에 自宅에서 逝去하시니 享年 69歲라. 訃音이 世宗임금께 들리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시고 近臣을 보내어 致祭하였으며 최고 벼슬을 贈하고 諡號를 文僖라 하고 不祧墓를 命하고 國葬으로 厚葬 하였다. 선비들이 崇墓하여 長成,宋山,高敞,儉岩,永春,龍溪에 모두 祠宇를 建立하여 向拜 하였다. 그 言行이 史冊에 나타나고 謚狀에 실리어 文獻을 가히 證據 할 수 있고 오직 敎書가 國史와 家乘에 실렸으니 “剛明하고 純粹하며 愼重하고 謙恭하며 度量이 깊고 文章이 뛰어나며 意志가 굳고 스스로 學文을 닦아 誠意正心의 道를 自得하고 學文이 넉넉하매 벼슬에 올라 化民成俗의 方法을 베풀며 職責을 다하여 公事를 받들며 마음을 잡고 몸을 단속하며,” 라고 하였으니 公의 平生事를 이에 다 記錄된 것이다. 朝野類輯에는 “太宗朝때 高麗宗室의 子孫으로써 民間에 섞여있는 者를 報告하는이가 있으면 太宗은 그들을 保護하려고 하니 劉 敞이 말하되 殿下께서 오늘날 이러한 뜻을 가지심은 실로 우리 宗社萬代의 福祚라고 하였다. 諫官들이 麗宗들을 誅斬할 것을 奏請하였으나 太宗 임금은 이에 不聽하였다. 그때에 臣下들응 도리어 麗宗들을 해치려고 하나 劉 敞만은 홀로 그 良心을 지켰다.”라고 하였고, 洪相 孔奭周가 지은 용계사 上樑文에 “처음에는 仁命 두자를 陳言 하였으니 聖道가 아니면 임금앞에서 陳啓를 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어서 홍범일편을 講進 하였으니 嘉謨가 있기 때문에 內殿에 들어 稟告 하였다. 金櫃와 玉板을 가진것도 公은 榮光으로 여기지 않고 煙閣과 雲臺에 올라서도 公은 高貴로 여기지 않았다. 國土 수천리를 一環으로 民生苦를 自身의 苦로 삼고 後世 億萬年을 目的으로 王業을 自身의 責任으로 삼았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實積을 들어 말 한 것이다. 配에 廣州李氏는 遁村先生의 女니 辰韓國夫人을 封하고 子에 仁統은 蔭仕로 吏曹判書요, 仁悌는 郡守요, 尙友는 御使요, 사위에 柳思訥은 大提學이며 諡 文肅公이다. 孫에 智周는 經歷이요, 信周는 兵使요, 繼周는 佐郞이라. 그 밑에 子孫들은 다 記錄하지않고 오직 宗派만을 記錄하노니 用良은 參判이요, 琨은 牧使요, 洐文도 牧使요, 德仁은 檢知요, 俊民은 副護軍이요, 尙顔은 蔭仕로 五衛將이요, 震夏는 迪順副尉요, 宗閒은 副司勇이요, 萬積,慶眞,弘祥 鋏學源이라. 墓는 廣州 龜川面 蟹川里 右麗壬座에(서울 강동구 상일동)있는데 婦人 李氏는 左祔 하였다. 옛날에 大提學 이행공이 지은바 碑文이 있는데 碑와 文이 모두 失傳되었음으로 그 덕업이 死後에 까지 빛나야 될것이 아무런 證據資料가 없고 상자에 두었던것도 永久保全을 못했음으로 子孫들이 이를 恨歎하여 숨은 史蹟을 캐내려고 가진 힘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다시 나타났으니 그 성의가 고마웠다. 슬프도다. 그칠줄을 알았음은 그치는 道가 있기때문이요, 마칠줄을 알았음은 마치는 義가 지극함이라. 道德의 文詞가 풍부하니 藝苑의 大家요, 禮義의금의를 입었으니 世子의 師父라. 이는 선생의 출사한 시종대절이며 格物致知의 용공을 發揮하고 돈세의지조를 堅持함은 선생이 간직한 심결로서 가히 百世까지라도 후인들의 표준이 될만 하다. 命하노니 國運이 열리려고 산신령이 下降하니 그 빛이 고울세라. 선암선생 태여났네. 선생의 포부에는 일월성신 밝아 있고 구슬같은 맑음하고 칼날 같이 날카롭게 벼슬자리 높았으나 누구라서 미치리요. 공자도를 배웠으되 선비중의 참선비라 성의정심 그 공부요 성속화민 그 政治라. 없지못할 인재라서 임금님이 문정하고 물누를 받지않고 깨끗한몸 덕 뿐이라. 려조말기 혼란해라. 세상사를 외면할 때 도는 것이 천리로다. 國運이 돌아오니 太祖임금 登極하자 자주찾아 불러다가 시망에 올랐기에 開國功臣 封 했으나 허명무실, 그녹권을 받아보니 미안해라. 신선될 그 마음은 고금의 일반이라. 은하수에 헤엄치듯 활발하게 휴양했네. 문체좋은 예복으로 사단에 오래있고 때로는 임금에게 命과 仁을 깨쳐주되 原理는 天道라. 기수홍범 진강하고 고려유족 보전하여 임금은혜 이뤘도다.큰 공적 생각보다 벼슬마다 뜻 굳치니 누구보다 도덕높고 몸은 가네. 저 시골로 새 고을에 祠宇제사 선비들의 빛이로다. 선생 事蹟 알려거든 碑에 새긴 글을 보라. 숭정기원후 넷째 병오년(헌종24년,서기1846년)에 숭정대부 판의금부사원임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 홍문관제학삼주 이광정 글.
이상과 같이 中間始祖인 玉川府院君 諱 敞에대한 대략적인 행적을 소개했다.
이상과 같이 中間始祖인 玉川府院君 諱 敞에대한 대략적인 행적을 소개했다.
※ 선조의 묘소 및 사당이 위치한 곳 ※
| 1. 시조 병부상서 문양공 휘 전 호 죽간선생 묘소 소재지 : 경북 영천군 영천읍 녹전리(배위 진한국부인 용서이씨 묘는 시조묘 계하) 사당(구인재) 및 신도비는 묘소와 함께 있으며 죽간선생문집 목각판을 보존하고 있는 재오정(사당)은 경북 영덕군 달산면 이곡동에 있음. 2. 9세 사헌대부대사헌 휘환, 배 정부인 강양이씨의묘. 소재지 : 경남 거창군 마이면 월계리 반월현에, 사당(영사정)은 거창군 위천면 장기리 신반장촌(위천국교교정)에 신도비와 함께 있음. 3. 10세 용궁현감 휘 담의묘 소재지 :경남 거창군 마이면 월계리 반월형에 있고 배 숙부인 성산이씨의묘는 위천면 황산리에 사당(불이재)은묘소에 황강재는 위천면대정리에 4. 12세 어영장군 병조판서 휘 귀손 강청공 묘소 소재지 : 거창군 위천면 대정리, 배 정경부인 완산이씨의묘는 거창 마이면 월계리에 12세 휘 영손의 묘와 함께 있음. 5. 13세 기자전 참봉 휘 관 및 기자전 참봉 휘 숙, 14세 휘 우민배 성종어씨, 14세 휘 우사 배 성주이씨의 묘 소재지 : 거창 위천면 대정리 황산에 6. 12세 옥천부원군 영의정 휘 창 문희공의 묘 및 신도비 배 진한국부인 광주이씨의 묘(신도비 포함) 소재지 : 서울 강동구 상일동 322번지 송계서원 및 사당은 전남 장성군 북상면 송산리에 어필각 및 영정각은 경북 칠곡군 북삼면 숭양리에 있음. 검암사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월암리 해천재 : 서울 강동구 상일동 산322번지 홍현갓 : 강원도 영월군 남면 흥월리 후평동 월계사 : 전남 승주군 월등면 담계리 7. 13세 이조판서 호 청계 휘 인통, 배 정부인 평양조씨묘9부좌) 소재지 : 서울 강동구 상일동 산 322 8. 13세 삼척진 수군절제사 휘 인부의 묘 및 묘선각 소재지 : 충북 단양군 영춘면 사이곡리 삼대산 덕거리 9. 14세 평안병마절도사 휘 신주의묘와 상덕재 소재지 : 충북 진천군 백곡면 사곡리 10. 15세 어모장군 휘 웅, 예조좌랑 휘 호, 진사 휘 표의묘 소재지 : 진천군 백곡면 사곡리 11. 15세 무장현감 임진공신 호 은재 휘 한라의묘 및 경모재 소재지 : 전북 고창군 고수면 하두치 |
위에 소개한 묘소 및 사당 이외에도 충북 제천, 전남 장흥, 강원 정선, 영월, 전주시 안양동 등
여러곳에 묘소와 사당이 있으나 여기에 다 열거치 못한다.
여러곳에 묘소와 사당이 있으나 여기에 다 열거치 못한다.
※ 현존 자손의 직계표 ※
| 1. 28세 병삼. 2. 29세 병삼의 자1 기열, 자2 사열. 3. 30세 기열의 자 재영, 사열의 자 재암. 4. 31세 재영의 자 화종, 재암의 자 금종. 5. 32세 화종의 자 영봉, 금종의 자 영주, 영선, 영취. 6. 33세 영봉의 자 광상, 재상, 광근, 광상, 복희, 복자. 영선의 자 두남, 춘상. 영취의 자 현상, 장상, 봉상. 7. 34세 현상의 자 환인(인기),환선(선기),환충(충기) |
※ 대 동 행 렬 도 ※
| 30세 : 時 ○ 載 ○ 31세 : ○ 鎬 ○ 鍾 32세 : 永 ○ 承 ○ 33세 : ○ 相 ○ 根 34세 : 煥 ○ 容 ○ 35세 : ○ 均 ○ 埴 36세 : 鎭 ○ 鉉 ○ 37세 : ○ 濟 ○ 洙 38세 : 東 ○ 桓 ○ 39세 : ○ 燮 ○ 榮 40세 : 圭 ○ 基 ○ |